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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가 만든 도시들( 자카르타, 코지코드 , 모카 )

by 어반IT 2025. 4. 9.

여행을 하다 보면 어떤 도시는 그 자체로 ‘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자카르타, 캘리컷, 모카. 이 세 도시는 단순한 항구나 수도가 아니었습니다. 향신료가 이끌고, 지배하고, 성장시킨 도시들이죠. 오늘은 이 세 도시가 어떻게 향신료와 함께 태어나고, 번영하고, 또 때로는 이용당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음식 이야기가 아니라 도시 이야기지만, 알고 보면 이 둘은 깊은 관계 속에 엮여 있다는 걸 느끼게 되실 겁니다.

자카르타 – 향신료 전쟁의 중심에서 수도로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는 지금은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지만, 그 뿌리는 사실 향신료에 있습니다. 자카르타의 옛 이름은 바타비아(Batavia)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본부가 자리잡았던 곳입니다. 17세기 당시, 향신료를 통제하려던 유럽 열강의 목적지는 몰루카 제도의 클로브와 육두구였지만, 그 향신료들을 수집하고 선적하고 다시 분배하는 중심지가 바로 이곳 자카르타였던 겁니다.

이곳에서 수출되던 향신료 중 하나는 캔들넛(Candlenut)이었습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 요리의 기본 베이스로 잘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기름 추출과 방부용, 심지어 조명용 재료로까지 사용되며 유럽 시장에서 높은 수요를 기록했죠. 캔들넛은 향보다는 그 유용성으로 인해 자카르타 무역 항구를 더욱 바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자카르타 항에는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모여든 향신료가 쌓였고, 이 항을 지배하는 자가 곧 향신료 무역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자카르타를 향신료 군사 거점으로 삼고, 철저하게 무역을 통제했습니다. 심지어 향신료가 몰루카에서 다른 항으로 흘러가는 것까지 막기 위해 무장한 선박이 이 도시를 중심으로 움직였다고 하니, 지금의 평화로운 도시 이미지는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늘날 자카르타에서 그 시절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구도심 지역과 구항구의 박물관을 방문하면 향신료 무역의 중심지였던 당시의 분위기를 조금은 느낄 수 있습니다. 조용한 항구도시가 어쩌다 ‘향신료 전쟁’의 심장부가 되었는지, 그 과정을 알고 보면 이 도시는 전혀 다르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코지코드 – 후추의 도시가 만든 항로의 역사

인도 남서부, 아라비아해를 따라 위치한 코지코드(Kozhikode)은 향신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도시 중 하나입니다. 이 도시는 말라바르 시나몬(Malabar cinnamon)과 후추(Pepper)의 주요 산지인 케랄라(Kerala)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고대부터 아랍 상인들과 중국, 유럽을 잇는 무역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하면서 처음 도착한 곳이 바로 이 코지코드입니다. 유럽이 인도에 첫발을 내딛게 된 순간이었죠. 그 이후 이곳은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까지 여러 열강의 손을 거치며 점차 식민지의 틀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중심에는 늘 향신료가 있었고요.

말라바르 시나몬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계피보다 향이 더 섬세하고, 깊이가 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이 향신료가 고기 요리에나 디저트, 심지어 의약품으로까지 쓰이면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향신료를 확보하기 위해 수많은 상선이 코지코드로 향했고, 도시는 점점 국제적 항구로 발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발전한 무역은 결국 현지인들의 손에서 멀어졌습니다. 포르투갈은 코지코드에 요새를 세우고 통행세를 요구했고, 향신료 가격과 흐름을 조절하기 위해 군사력까지 사용했습니다. 후에는 영국이 케랄라 전체를 점령하며 향신료 재배를 ‘계약농업’ 방식으로 전환시켰고, 이는 현지 농민들의 자율성을 빼앗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현재의 코지코드는 조용한 해안도시이지만, 그 거리를 걷다 보면 향신료 마켓과 오래된 창고, 수출용 항구에서 여전히 그 역사를 느낄 수 있습니다. 후추 한 알로 시작된 인도와 유럽의 연결점, 그 출발선이 바로 이곳 코지코드였다는 점은 분명 기억할 가치가 있습니다.

모카 – 커피 이전에 향신료로 유명했던 아라비아의 문

‘모카’라는 이름을 들으면 보통 커피가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예멘의 항구도시 모카(Mocha)는 향신료와 허브 무역의 거점이었습니다. 아라비아 반도 남부 해안에 위치한 이 도시는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교차점이자, 15세기 이전에는 커피보다도 코스트스(Coastes root)와 각종 약초류가 무역의 중심이었습니다.

코스트스는 오늘날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고대 아라비아에서 제사와 치유 의식에 사용된 뿌리 향신료입니다. 묵직하면서도 매운 향이 특징이며, 증류나 향료 베이스로도 널리 쓰였습니다. 당시 모카 항에서는 이 코스트스와 다양한 허브, 유향, 몰약 등도 함께 거래되며 중동 전체 약초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커피가 이 지역에서 생산되며 모카는 ‘커피의 도시’로 재정의되었지만, 초기 무역의 흐름은 명백히 향신료와 의약 허브였습니다. 심지어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모카를 중심으로 한 허브 무역이 조세 수입의 주요 기반이 될 정도였죠.

모카는 커피 무역 이후 점점 상업 중심지에서 멀어졌지만, 그 항구와 구도심에서는 여전히 향신료와 허브의 냄새가 남아 있습니다. 시장을 걷다 보면 지금도 말린 허브와 뿌리 향신료가 곳곳에서 팔리고 있고, 유럽의 상인들이 찾아왔던 고대 도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카페 문화 속 ‘모카’라는 단어가 사실은 이런 향신료 도시에서 유래했다는 점, 많은 분들이 모르고 계시더라고요.

예멘 모카
예멘 모카

향신료가 도시의 얼굴을 만들었습니다

자카르타, 코지코드, 모카. 이 세 도시는 각기 다른 지역, 다른 문화권에 속해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향신료가 그 도시를 세계로 연결하는 창이자, 때로는 식민과 수탈의 통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향신료는 맛을 넘어서, 항로를 바꾸고 도시의 지도를 바꾸고 사람들의 삶을 바꿨습니다. 다음에 향신료 하나를 고를 때, 혹은 모카 커피를 주문할 때, 이 도시들의 이름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한 번 떠올려보시면 어떨까요? 그 한 스푼의 향에는 수백 년의 도시사가 녹아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