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추석, 동지… 명절 음식 이야기라면 떡이나 전이 먼저 떠오르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술이 먼저였습니다. 한국의 전통 명절은 단순한 음식 축제가 아니라 조상과 하늘, 땅, 그리고 이웃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 의식이었고, 그 중심엔 늘 막걸리를 비롯한 전통 술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한국 전통 명절과 술’을 주제로, 명절의 진짜 주인공이었던 술과 그 속에 담긴 의미들을 함께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명절과 제례 속의 막걸리 – 술은 조상과 나누는 첫 번째 인사
우리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은 단연 설날과 추석입니다. 이 날 아침,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제사를 지내며 조상께 감사를 전하는 의식을 ‘차례’라고 부르죠. 이 차례상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술잔입니다. 그리고 그 잔 속에는 대부분 막걸리 혹은 청주가 담겨 있었습니다.
술은 차례의 가장 앞줄, 제물 가운데 첫 자리에 놓이며, ‘홀수 번 잔을 따른다’는 예법에 따라 정해진 방식으로 조상에게 올려집니다. 이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곡식의 정수이자 우리의 정성을 담은 가장 순수한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농경 사회였던 한반도에서는 곡식을 수확한 뒤 그 일부를 발효시켜 술로 만들고, 그 술을 하늘과 조상에게 바쳤습니다. 즉, 술은 땅에서 난 곡식을 다시 하늘로 돌려보내는, 자연의 순환을 담은 ‘의식의 상징’이었던 셈입니다.
특히 막걸리는 서민들의 술이면서도 명절상에 자주 올랐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직접 빚을 수 있었고, 둘째, 정성을 담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집집마다 맛이 다르고, 빚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던 막걸리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가족의 마음과 손맛이 담긴 술이었죠. 그 술을 통해 조상과 대화하고, 살아 있는 가족 간에도 정을 나누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제사상을 형식적인 절차로 느낄 수 있지만, 그 한 잔의 술에는 사실 아주 깊은 의미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조상에게 가장 먼저 건네는 인사, 그것이 바로 막걸리 한 잔이었습니다.
명절놀이와 술 – 마을 전체가 함께 마신 잔
명절은 가족만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한 해 농사를 마치고 여유가 생긴 시기, 마을 전체가 함께 모여 먹고 마시며 놀이를 즐기던 것이 전통 명절의 모습이었죠. 이때도 중심에는 늘 술이 있었습니다. 단지 취하기 위한 술이 아니라, 함께 웃고, 노래하고, 장단을 맞추는 도구로서의 술이었습니다.
설날에는 복조리를 팔고, 윷놀이를 하고, 정초의 고사를 지내며 한 해의 무탈을 기원했습니다. 이때 마시는 술은 보통 ‘약주’ 또는 ‘세주’라고 불리는 청주 계열의 전통주였습니다. 이 술에는 ‘액을 막고 복을 맞이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죠. 그래서 첫 잔은 어른에게, 두 번째 잔은 조상신에게, 세 번째 잔은 이웃과 나누는 구조로 이어졌습니다.
추석에는 ‘한가위 대동놀이’라 불리는 마을 단위의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줄다리기, 강강술래, 씨름 같은 전통 놀이들이 있었고, 이를 마친 후에는 마을 어귀에서 막걸리를 돌려 마시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한 그릇에 담긴 막걸리를 돌려가며 마시는 이 행위는 단지 술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안녕과 화합을 기원하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또한 명절에는 여성들도 공개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기였습니다. 평소에는 절제되던 행동이 명절이라는 이름 아래 해방되었고, 이는 계절과 인간의 감정, 자연의 흐름이 어우러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술은 억눌린 감정을 풀고, 노래와 웃음을 만들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는 촉매제였습니다.
지금은 술 마시는 문화가 개인화되어 있지만, 한때는 함께 마시는 것이 당연하고, 그 자체가 축제의 정점이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죠.
막걸리의 재발견 – 잊혀진 명절의 기억을 되살리다
현대 사회에서 명절과 술의 관계는 많이 희미해졌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가정도 줄고, 떡이나 과일만 간단히 차리는 경우도 많아졌죠. 막걸리는 ‘촌스럽다’는 인식 속에 한동안 외면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전통주와 막걸리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수제 막걸리 클래스, 지역별 막걸리 투어, 전통주 소믈리에 과정 등이 인기를 끌며, 막걸리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맛있는 술’을 넘어서, 문화적 의미와 정서를 공유하는 방식으로서의 술이 다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명절 시즌에 맞춰 ‘명절 막걸리’ 한정판을 출시하거나, 조상에게 바치는 술로 정제된 전통주를 고르는 소비자들도 늘고 있습니다. 이는 술을 단지 마시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나누고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바라보는 변화의 움직임입니다.
또한 지역 막걸리의 다양성도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안동소주, 문경 오미자 막걸리, 해남 흑미 막걸리, 제주 청귤 막걸리 등 지역의 정체성을 담은 술들이 명절 선물로 떠오르며, 예전처럼 ‘정성을 담은 한 잔’을 다시금 의미 있게 만들고 있는 것이죠.
떡보다 먼저 상에 올랐던 막걸리. 그 한 잔 속에는 가족과 조상, 계절과 땅, 그리고 마음과 마음 사이를 이어주는 정서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잔을 다시 들 준비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막걸리 한 잔에 담긴 명절의 진짜 의미
명절은 먹는 날이기도 하지만, 나누는 날입니다. 막걸리는 그 나눔의 시작이었고, 끝이었습니다. 조상께 올리는 첫 잔, 가족과 도란도란 나누는 잔, 이웃과 함께 돌려 마시는 그 한 그릇은 단지 술이 아니라, 기억이고, 정이고, 고마움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의미를 잠시 잊고 있었을 뿐, 술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매개입니다. 명절에 막걸리 한 잔을 따르며, 그 속에 담긴 시간과 마음을 다시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떡보다 먼저 준비된 그 술 한 잔에, 진짜 명절의 향기가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