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금주를 권장하는 종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뿌리가 깊은 지역 문화와 만나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집니다. 대표적인 예가 티벳입니다. 이 고산 지대에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창(Chang)’이라는 발효 우유주를 만들어 마셔 왔고, 단순히 일상 음료를 넘어서 종교적·의례적 의미까지 부여해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창’이라는 술이 어떻게 티벳 불교와 공존하며, 삶과 신앙, 발효가 하나로 연결되어 왔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창(Chang)이란 무엇인가 – 고산지대의 생존이 만든 술
‘창’은 티벳, 네팔, 부탄 등 히말라야 고산지대에서 널리 마시는 전통 발효주입니다. 지역에 따라 ‘통바(Tongba)’, ‘치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주로 보리, 수수, 기장, 우유, 때로는 야크 우유까지 발효하여 만듭니다.
특히 티벳의 창은 다른 나라의 전통주와 달리 ‘유제품 기반의 발효주’가 많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합니다. 고산지대는 곡물 재배가 제한적이고, 대신 유목을 통해 얻는 우유 자원이 풍부합니다. 이 우유를 자연 효모와 온도에 맡겨 천천히 발효시키면, 단맛과 신맛이 함께 어우러진 마일드한 술이 탄생합니다.
창은 지역에 따라 알코올 도수가 낮거나 매우 높으며, 주로 따뜻하게 데워서 마십니다. 이는 혹한의 기후에서 몸을 녹이고, 내부 장기를 보호하기 위한 생활의 지혜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겨울철이나 축제 기간에는 거의 매일 창이 식탁에 오르며, ‘뜨거운 술을 나누는 것’이 사람 사이의 정을 확인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창을 마시는 도구와 방식에서도 문화가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전통적으로는 목제 또는 은제 컵에 담아 손님에게 건네며, 한 모금 마실 때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예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창을 대접하는 것은 가장 큰 환영의 표현이며, 이를 거절하는 건 무례한 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티벳 불교와 창 – 금주 계율과 문화의 조화
그렇다면 불교는 술을 금하는데, 왜 티벳 불교 문화에서는 창이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었을까요? 그 해답은 ‘불교의 유연성’과 ‘문화의 존중’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에 있습니다.
먼저, 티벳 불교는 대승불교의 한 갈래로, 실천보다는 깨달음과 자비를 중시하는 수행법을 강조합니다. 물론 승려와 수행자에게는 음주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재가신자(재속 불교인)에게는 술에 대한 계율이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적용되어 왔습니다.
티벳 불교에서는 창을 단순한 음주가 아닌 ‘공양의 도구’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일부 의식에서는 창을 신에게 바치거나,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례에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때는 마시기보다는 붓고, 향을 맡고, 의미를 담는 의식의 일부로 기능을 합니다.
또한 많은 티벳 불교 스승들은 창의 문화적 가치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창은 생존을 위한 음식이며, 공동체 결속을 위한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을 마신다고 해서 불경스럽다거나 수행을 방해한다고 보지 않았고, 오히려 자비의 마음으로 그 문화를 함께 품어준 것입니다.
이러한 관용은 티벳 불교가 단순한 교리 집행을 넘어서,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든 종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종교가 문화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방식. 창은 그 상징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창과 의례 – 탄생, 죽음, 축제를 연결하는 술
창은 단순한 생활주가 아니라, 티벳인의 삶의 전 주기와 함께하는 의례적 음료입니다. 출생, 결혼, 장례, 축제에 이르기까지 창은 거의 모든 중요한 순간에 등장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창을 신에게 바치며 건강을 기원하고, 결혼식에서는 신랑·신부가 함께 창을 나누며 서로의 삶에 들어감을 상징합니다. 특히 결혼식에서의 창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함께 발효된 인연’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재료처럼 섞여 하나의 발효물이 되어 간다는 인식이 깃들어 있는 것이죠.
장례식에서는 죽은 이의 영혼이 무사히 윤회할 수 있도록 창을 땅에 붓고 기도를 합니다. 이때 창은 하늘과 땅,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슬픔 속에서도 창을 나누며 삶의 순환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불교적 세계관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티벳 최대 명절인 로사르(Losar, 티벳 설날)에는 창이 빠지지 않는 축제 음식입니다. 사람들은 일주일 이상 창을 만들고, 이웃과 친척들에게 나눠 마시며, 노래와 춤을 곁들여 함께 기뻐합니다. 이 시기의 창은 특별히 향신료와 버터, 보리를 더해 진하고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처럼 창은 단순한 알코올 음료가 아니라, 의례와 감정, 시간과 관계를 담는 술입니다. 그것은 마시는 것이자, 나누는 것이며, 기억하고 기원하는 방식의 하나입니다.
창, 발효의 술에서 삶의 철학으로
티벳의 창은 단지 고산지대에서 생존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누고, 종교적 의미를 담고, 인간관계를 이어주는 발효된 마음의 언어였습니다.
불교의 금주 계율과 창 문화의 공존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진정한 수행이란, 절제와 금기가 전부일까요? 아니면, 삶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자비의 실천일까요? 티벳의 창은 그 답을 조용히 말해주는 듯합니다. 술 한 잔을 나누는 그 순간, 우리는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