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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와 주류 – 조상에게 올리는 술의 문화사

by 어반IT 2025. 4. 10.

“조상님께 술 한 잔 올려라.”
아마 어릴 적 설이나 추석, 혹은 제사상 앞에서 한 번쯤은 들어본 말씀이실 겁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문화에서는 술이 단순한 음료 그 이상이었습니다. 조상과 대화하는 수단, 예를 갖추는 방식, 그리고 영혼을 깨우는 상징이었지요. 이번 글에서는 ‘조상에게 올리는 술’이라는 관점에서 제사와 주류의 문화사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제사주 – 예(禮)의 본질이 담긴 한 잔

한국 전통 제사에서 술은 빠질 수 없는 중심 의례 중 하나입니다. 제사상을 차릴 때도 가장 먼저 놓이는 것이 술잔이며, 초헌(初獻)·아헌(亞獻)·종헌(終獻)의 세 번에 걸쳐 술을 따르는 의식이 이어집니다. 이 순서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조상에 대한 존경과 정성을 표현하는 방법이며, 유교적 예법이 체계화된 결과입니다.

술을 따르는 방식에도 규범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홀수 번 따르기’입니다. 이는 동양철학에서 홀수는 양(陽), 즉 생명과 우주의 기운을 상징하기 때문에, 술을 따를 때도 1·3·5번 등 홀수로 따르는 것이 ‘좋은 기운’을 불러온다고 여겼습니다. 술잔을 들어 올릴 때도 두 손으로 정중하게 들며, 방향은 좌측에서 우측으로 순차적으로 이동합니다. 이렇게 작은 행위 하나하나에 정성과 예가 담겨 있는 것이죠.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제사주 대부분이 쌀을 재료로 한 청주, 탁주, 막걸리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술이 단순히 맛이나 도수가 아니라 ‘곡식의 정수’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벼농사 사회에서 쌀은 곧 생명의 상징이었고, 그것을 발효해 만든 술은 ‘조상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음식’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비단 한국만의 전통은 아닙니다.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문화권 전반에서 제사에는 술이 반드시 따라붙습니다. 중국에서는 ‘제(祭)에는 반드시 주(酒)가 있어야 한다’는 고사가 있을 정도로, 술은 제사의 기본 구성 요소였습니다. 일본의 경우도 신사에서의 신주(神酒)는 미리 정해진 청결한 절차를 따라 만들어지며, 이는 지금까지도 명절, 결혼식, 상례 등에서 그대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제사와 주류
제사와 주류

조상신과 함께 나누는 한 잔 – 동남아와 아프리카의 제례술

아시아의 다른 문화권에서도 술은 조상과의 연결 고리였습니다. 베트남, 태국, 라오스 등의 지역에서는 명절과 기일마다 제단에 소량의 술을 부어 바치는 의식이 일반적입니다. 특히 베트남에서는 설날 아침, 가장 먼저 조상의 영혼에게 술을 올리는 것으로 새해가 시작됩니다. 이는 조상과 후손이 함께 살아간다는 순환적 생명의 인식을 반영하는 행위입니다.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는 ‘루악(Ruou)’이라는 전통 쌀술이 조상제사에 필수로 사용됩니다. 술을 따를 때는 작은 도자기 잔을 사용하며, 이를 땅에 조금 붓는 ‘땅에 바치기’ 행위가 동반됩니다. 이는 ‘대지의 영혼’과 ‘조상의 넋’ 모두에게 예를 갖추는 상징입니다.

한편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에서는 제사와 술이 좀 더 직접적이고 역동적인 방식으로 연결됩니다. 예컨대 가나와 나이지리아 일부 부족에서는 ‘리비션(Libation)’이라고 불리는 의례를 통해 술을 땅에 붓고 조상신, 땅의 정령, 부족의 수호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때 사용하는 술은 대개 야자수주, 수수주 등 전통적으로 자급자족한 곡물로 만든 발효주입니다.

리비션에서는 말과 함께 술이 뿌려집니다. 예를 들어 “이 잔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기억하며, 이 술은 땅의 숨결에 드립니다”라는 식의 선언과 함께 술을 천천히 붓는 것이죠. 이 행위는 단순한 술 소비가 아닌, 말과 술, 몸짓이 하나 되는 살아있는 제례입니다.

이러한 문화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정적인 제사’ 이미지와는 다르게, 술이 신성하고 능동적인 의사소통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술은 단지 마시는 것이 아니라, 땅에 주고, 신에게 주고, 조상과 나누는 행위였던 것이죠.

술에 담긴 말 없는 기도 – 서양의 제의와 제례주

서양에서도 술은 제사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에서 와인은 신전 제물의 하나로 정기적으로 바쳐졌고, 가정에서도 조상신 혹은 집을 지키는 신에게 소량의 와인을 따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의식을 ‘리비션(Libation)’이라고 부르며, 술을 잔에서 땅으로 조금씩 붓는 방식은 앞서 언급한 아프리카 문화와도 유사합니다.

흥미롭게도 유럽 기독교 문화에서도 술은 여전히 제의의 중심에 있습니다.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포도주가 ‘예수의 피’로 상징되며, 성찬식에서는 이 술을 마시는 의식을 통해 신과의 연결, 죄의 정화, 공동체의 연합을 상징합니다. 즉, 술 한 잔이 그 자체로 제사의 신비를 품고 있는 것이죠.

유대교에서도 안식일과 절기에는 ‘키두시(Kiddush)’라고 불리는 축복의 포도주 의식이 존재합니다. 이는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소규모 제례 형태의 행사로, 부모가 자녀와 함께 포도주를 들며 축복의 문장을 외우는 방식입니다. 가족이 신과 함께 존재한다는 상징이 이 한 잔에 담겨 있는 셈입니다.

또한 켈트족, 북유럽의 바이킹 문화에서도 술은 전사들의 영혼을 기리는 의식에서 빠지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를 위한 ‘벌꿀주(Mead)’나 맥주는 의례용으로 반드시 준비되었고, 이를 통해 전사들이 천상의 연회에 합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술을 단순히 이승에서 마시는 음료가 아니라, ‘사후세계로의 여권’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조상을 위한 언어였으며, 그것이 한 잔의 술로 남아 오늘날까지도 계승되고 있습니다.

결론 – 술은 가장 인간적인 제물이었다

우리는 종종 술을 단순한 기호식품, 여흥의 도구로 여기지만, 전통 문화 속에서 술은 ‘가장 인간적인 제물’이었습니다. 인간이 직접 빚고, 기다리고, 나누고, 조심스럽게 올리는 한 잔. 그것은 말 없는 기도이자, 살아 있는 이가 죽은 이와 나누는 가장 진심 어린 대화였던 것이죠.

다음에 제사상에서 술을 따를 기회가 있다면,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이 술은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내 뿌리와 연결되는 하나의 의식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죠. 그 한 잔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누구와 이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