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신의 축복이라면, 그 술 자체가 신이 되는 일은 가능할까요? 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었습니다. 디오니소스, 바쿠스, 그리고 하이르—이들은 단순히 술을 좋아하는 신이 아니라, 술 그 자체를 상징하는 신, 술의 형상이 곧 신의 얼굴이 된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술이 어떻게 신이 되었고, 그 신들이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디오니소스 – 와인이 곧 신이 된 고대 그리스의 황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디오니소스(Dionysos)는 와인의 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본질은 단순한 음료의 수호자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그는 인간의 감정, 광기, 창조성, 해방, 황홀경을 모두 상징하는 존재였으며, 와인은 그런 감정들을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체였습니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인간 여성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난 신으로, 신성과 인간성을 동시에 지닌 ‘경계의 신’이었습니다. 그는 종종 ‘죽고 되살아나는 신’으로 묘사되며, 이는 포도나무의 계절적 생명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포도가 익고, 짓이겨지고, 발효되어 술이 되는 과정은 곧 인간의 삶과 죽음, 재탄생을 상징하는 의식이었습니다.
디오니소스의 의식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디오니시아(Dionysia)' 축제입니다. 이 축제에서는 도시 전체가 술과 음악, 연극에 빠져들었고, 제단 앞에서 와인을 붓고 마시며 신에게 봉헌했습니다. 참여자들은 단순히 관람자가 아닌, 신과 일체가 되는 행위자로서 ‘엑스터시(ecstasy)’ 상태를 경험했죠. 이는 현대 심리학에서도 '트랜스 상태'로 분석되며, 인간이 집단의식을 통해 초월적 감정을 체험하는 사례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그래서 ‘와인을 관장하는 신’이 아니라, ‘와인 그 자체’로 여겨졌습니다. 와인을 마신다는 건 곧 디오니소스를 마신다는 뜻이었고, 그 술을 통해 사람들은 신성함에 잠시 닿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술은 디오니소스의 육체요, 그 향은 그의 숨결이었던 셈이죠.
바쿠스 – 로마식 해방의 신, 술과 쾌락의 주인
로마로 넘어오면, 디오니소스는 바쿠스(Bacchus)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름만 다를 뿐 본질은 유사하지만, 로마 문화에서는 바쿠스가 조금 더 '대중적이고 외향적'인 신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특히 로마의 도시문화와 함께 바쿠스는 축제, 연회, 그리고 향연의 중심으로 기능하며 술의 대중화를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바쿠날리아(Bacchanalia)’라 불린 이 축제는 처음엔 종교적 제의로 시작됐지만, 점차 쾌락 중심의 사회적 이벤트로 확장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와인을 신에게 바치며 조용히 시작되던 의식이, 시간이 지나며 술에 취한 채 춤을 추고 노래하고 밤새 축제를 즐기는 형태로 바뀌게 된 것이죠. 이로 인해 로마 원로원에서는 한때 바쿠스 축제를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방탕함 때문이 아니라, 신과 일체가 되는 ‘비이성적 상태’가 사회질서를 흔들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쿠스 역시 신의 피를 상징하는 와인을 통해 인간과 신의 경계를 허물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술을 통해 인간이 숨겨왔던 감정—쾌락, 욕망, 진실, 고통—을 외부로 표출하게 만드는 ‘해방의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쿠스의 술은 기쁨이면서도 위험이었고, 축복이면서도 경고였습니다.
현대의 '바카널리즘(bacchanalism)'이라는 단어는 바로 이 바쿠스 축제에서 유래한 것으로, 감정의 폭발과 규범에서의 일탈을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술을 단순한 소비재가 아닌, 인간의 본성을 끌어내는 열쇠로 보는 시각은 이 시기부터 뿌리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이르 – 조로아스터교의 신성한 발효, 하오마의 기억
조로아스터교에는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술과 유사한 신적 존재가 등장합니다. 바로 하오마(Haoma)입니다. 하오마는 식물 자체이자 음료이며, 제사의 핵심이 되는 발효된 액체입니다. 그리고 이 신성한 음료를 다루는 신적 개념이 바로 ‘하이르(Haurvatat, 또는 Haoma)’입니다. 이 이름은 ‘온전함’ 또는 ‘완전성’을 뜻하며,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고 신의 축복을 전하는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오마는 고대 이란 지역에서 채집된 식물에서 추출한 즙으로, 발효 과정을 통해 신성한 성분이 깃든다고 믿었습니다. 이를 제사에 사용하며, 영적인 정화, 불사의 축복, 용기를 부여하는 음료로 간주했죠. 흥미롭게도 하오마 의식은 사제들이 직접 음료를 만들고, 의식 전에는 금식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절차가 함께 동반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례적이고 체계적인 술 문화였습니다.
하오마를 마시는 행위는 인간이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일시적으로나마 초월적 존재와 연결되는 통로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디오니소스나 바쿠스처럼 육체적 황홀에 집중하기보다는, 내면의 정화와 정신적 고양을 목표로 하는 ‘명상적 음주’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오마는 실제 식물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그 개념은 인도 베다의 ‘소마(Soma)’와도 유사성을 지닙니다. 술이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신에게 닿기 위한 ‘매개체’였다는 고대 신앙은 동서양을 아우르는 공통된 인식이었던 것입니다.
술은 신이 되고, 신은 술이 되었다
디오니소스, 바쿠스, 하이르. 이 세 신은 술을 넘어서 술 그 자체가 되었고, 그들은 인간의 무의식과 종교, 사회 질서, 영혼의 작동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술은 신의 선물이라기보다는, 신과 인간이 공유하는 정서의 그릇이었고, 그 속에는 황홀, 해방, 정화라는 키워드가 녹아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술을 가볍게 소비하고, 그 신성함보다는 오락성과 일상성에 집중하고 있지만, 그 기원 속에는 놀라운 믿음과 경건함이 숨어 있었습니다. 술을 마신다는 건, 아주 오래 전에는 신을 맞이하는 의식이었고, 신을 몸 안에 들이는 신비로운 행위였습니다. 술 한 잔이 주는 감정의 진폭이 단지 알코올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속에는, 여전히 신이 살고 있는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