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술은 단순히 ‘빚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기다림 속에서 사람들은 ‘신성함’을 발견해 왔습니다. 발효라는 과정을 통해 시간이 스며든 술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단지 취하기 위한 음료가 아니라 신과 자연, 인간과 영혼을 연결하는 마법 같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이 글에서는 술이 되기까지의 기다림이 어떻게 주술과 의례, 영적 신념과 연결되어 왔는지를 다양한 문화적 맥락에서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발효와 주술 – 술이 되기까지 기다림의 신성함
발효와 주술 – 술이 되기까지 기다림의 신성함

발효라는 의식 – 술이 되기까지 기다림의 철학

발효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작용하는 과정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곡물과 물을 만나 스스로 술이 되어가는 이 변화는 과거 사람들에게 신의 손길, 영의 개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불, 바람, 물, 곡식—모두 자연의 요소이며, 술은 이들을 하나로 모아 시간이 빚은 결정체였습니다.

고대에는 발효 과정이 과학이 아닌 ‘기적’으로 여겨졌습니다. 중동 지역에서는 술이 자연 발효된 것을 ‘신이 남긴 흔적’이라 했고,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맥주를 빚는 여사제가 ‘니inkasi’라는 여신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여신의 이름은 맥주송이라는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인류 최초의 양조법이자 주술적 의식문서로도 해석됩니다.

중국의 주나라와 한나라 시기에도 술은 ‘성스러운 것’으로 취급되어 국가 의례의 중심에 있었고, 술을 빚는 사람은 단지 기술자가 아니라 ‘제례의 일부를 담당하는 사제’로 여겨졌습니다. 술을 빚기 전에는 목욕재계하고, 특정한 날과 시를 택해 술을 담그는 것이 의무였으며, 이는 발효 자체가 하나의 주술 행위로 간주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요소도 매우 중요합니다. 술은 단지 만들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다림 속에서 사람들은 신에게 기도하고, 정성을 담으며, 조상과 자연, 하늘에 연결되기를 염원했습니다. 발효는 단지 화학 변화가 아니라 기도와 예언, 정성과 통제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주술과 술 – ‘빚는 자’는 언제나 사제였다

고대와 근세까지, 술을 만드는 자는 대부분 종교적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이는 단지 술을 빚는 기술 때문이 아니라, 술 자체가 신과 연결된 물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술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한 생산 행위가 아니라, 신성한 영과 교류하는 주술 행위였던 셈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신도에서는 ‘미키(神酒)’라는 제례용 사케를 여성 무녀가 직접 빚습니다. 이때 사용되는 쌀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씻고, 무녀는 며칠 전부터 목욕재계하며 절대 말을 아낍니다. 그 이유는 ‘말이 술에 영향을 준다’는 신념 때문이며, 이 술은 오직 제사에만 쓰이며 일반에 판매되지 않습니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샤먼 문화에서도 술은 강신 의식의 핵심 도구입니다. 특히 겨울철 의식에서는 발효된 우유주(예: 아이락)를 마시고 트랜스 상태에 도달하며 신령과 대화하는 방식이 전통으로 전해집니다. 샤먼이 직접 술을 빚거나 고른다는 점에서, 술은 의식 그 자체이자,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물리적 매개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마야와 아즈텍 문명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들은 ‘풀케’라는 발효 음료를 만들었고, 제사 때 사제들만이 이 술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술을 통해 신과 교감하는 능력을 가진 자는 술을 직접 빚고, 그것을 어떻게 마실지도 규정할 수 있는 힘을 가졌습니다. 결국 발효라는 기다림의 기술은, 권위와 계급, 의례의 구조까지 포함한 주술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발효를 둘러싼 금기와 정결 – 술은 아무나 만들 수 없다

발효는 단지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 ‘정결’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발효 자체가 민감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더 깊게는 영적 공간으로서의 술독과 그것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였습니다.

한국의 전통 양조에서도 술을 빚는 기간에는 욕을 하거나 싸우지 않고, 부정한 기운이 술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여자가 생리 중이면 술방에 들어가지 못했고, 남자도 술을 빚는 날은 신체를 정결히 하여야 했습니다. 이는 과학적 근거 이전에 발효의 신성성을 보존하기 위한 금기였던 것입니다.

이런 금기는 서구 문화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납니다. 중세 유럽 수도원에서 만들어진 맥주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정결한 액체였습니다. 수도사들은 일정한 절차에 따라 맥주를 만들고, 발효가 끝나기 전까지 외부인의 출입을 금했습니다. 이 과정 역시 발효를 기다리는 시간이자, 기도와 명상이 함께하는 ‘정화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발효에 사용되는 물과 공기, 도구는 모두 정결하게 유지되어야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위생 개념이 아니라, ‘잡기’를 막고 술 속에 영적으로 불순한 요소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의례적 규칙이었습니다. 술은 만들어지는 동안 신에게 향하고 있었고, 그 여정을 방해하는 어떤 요소도 배제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즉, 발효는 단지 화학적 변화가 아니라, 주술적 정화의 공간이자, 신의 개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된 공간으로 간주되었던 것이죠.

술은 기다림이고, 기다림은 곧 믿음이다

우리는 술을 마실 때 그 깊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술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의례이며 철학이었습니다. 발효는 기술이기 이전에 믿음의 행위였고, 기다림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정성과 집중,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교감이었습니다.

술은 기다림의 끝에서야 비로소 ‘되며’, 이 기다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과 신, 그리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발효의 시간 동안 사람들은 조용히 기도했고, 말없이 술독을 바라보았으며, 때로는 술이 무사히 익기를 위해 밤마다 정화수를 뿌렸습니다. 술은 그렇게 영혼이 담긴 액체가 되었고, 단순히 마시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바치는’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술을 공장에서 빠르게 생산하지만, 예전의 사람들은 술을 기다렸고, 그 기다림 속에 세상의 이치와 신의 숨결을 담았습니다. 발효는 그저 시간이 아닌, 영적 긴장 속의 정숙한 기다림이었으며, 술은 그 기다림을 지나 탄생한 ‘기록되지 않은 기도’였는지도 모릅니다.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