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대부분의 고대 문명에서 제사나 종교 의례에는 술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술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작용했고, 종종 신성한 물질로 여겨지기도 했죠. 그런데 흥미로운 예외가 있습니다. 바로 마야와 잉카 문명입니다. 이 두 거대한 중남미 문명은 술을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사용을 배제하는 제례 문화를 가졌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왜 이들은 술을 쓰지 않았을까?’, ‘그 대신 무엇을 썼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마야 문명 – 신과 피, 그리고 초콜릿의 제사
마야 문명은 지금의 멕시코, 과테말라, 벨리즈 일대에서 번성했던 고대 문명입니다. 이들은 매우 발달된 달력 체계와 문자, 천문학을 가졌지만, 무엇보다 특이한 건 제사의 중심이 술이 아니라 ‘피’와 ‘카카오’였다는 점입니다.
마야인들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제물은 인간의 피였습니다. 그들은 왕과 사제가 자발적으로 손가락, 혀, 귀를 찔러 피를 흘렸으며, 그것을 태워 신에게 바치는 ‘자해 희생(Bloodletting)’ 의식을 통해 신과 연결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일종의 정신적 고양 상태로 이어지는 트랜스 행위였으며, 술 없이도 강한 종교적 몰입을 유도했습니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카카오’입니다. 마야 문명에서 카카오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신에게 바치는 신성한 액체였습니다. 이들은 카카오를 곱게 갈아 물에 타고, 칠리, 바닐라, 꿀을 섞어 진한 음료를 만든 뒤, 이를 제사에 사용했습니다. 이 초콜릿 음료는 술보다도 더 귀하고 신성한 ‘의식의 음료’로 여겨졌습니다.
마야의 신들 중 일부는 카카오 나무와 직접 연결되었으며, ‘카카오 신전’도 존재했습니다. 실제로 고고학적 발굴에서는 제단 근처에서 발효 흔적이 없는 카카오 음료기구가 발견되기도 했죠. 이는 마야인들이 술을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술을 배제하고 다른 상징적 음료를 채택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잉카 문명 – 치차(Chicha)의 경계와 절제의 미학
잉카 문명은 페루 고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안데스 고대 문명으로, 높은 산지에서의 생존기술과 정치적 통제력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잉카인들도 의례와 제사에 정성을 다했지만, 그들의 방식은 마야와 또 달랐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의식 음료는 치차(Chicha)라는 발효 옥수수 음료였습니다.
치차는 술이긴 하지만, 현대 우리가 말하는 알코올 음료와는 다릅니다. 도수가 매우 낮고, 종종 알코올 함량이 거의 없는 형태로 제사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치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붓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는 점입니다. 잉카의 주요 제의인 ‘Inti Raymi’ 태양제에서는 이 치차를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사용했으며, 땅에 붓거나 신전 앞에 놓아두는 형태로 제례가 진행됐습니다.
즉,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붓고, 바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술이 정신적 해방의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상징이었다는 걸 시사합니다. 치차는 여자들이 집에서 직접 만들어야 했고, 제사에 쓰일 치차는 반드시 ‘정결한 사람’이 만든 것이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잉카는 술을 단순한 취함의 도구로 허락하지 않고, 신성하고 통제된 방식으로만 허용했던 것입니다.
또한, 잉카 제국에서는 왕과 귀족만이 특정 상황에서 술을 마실 수 있었고, 일반 대중에게는 그 사용이 엄격히 제한되었습니다. 특히 종교적 축제에서는 술에 취한 상태로 의식을 행하면 안 된다는 경고가 있었고, 이는 기록된 율법과 구술 전승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술은 있되, 취함은 없던 종교 문화. 매우 독특한 통제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술을 배제한 이유 – 정신의 맑음이 신과 통하는 길
그렇다면 왜 마야와 잉카는 대부분의 문명과 달리 술을 제례에서 배제했을까요? 단순히 재배 조건이 맞지 않아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이들 문명도 술을 만들 수 있었고, 실제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종교 의례에서 술을 어떻게 쓰느냐’에 대한 태도가 달랐던 것입니다.
공통점은 ‘정신의 맑음’이 신과의 연결에 필수적이라는 인식입니다. 술은 정신을 흐리게 하고, 통제력을 약화시킨다고 여겨졌고, 이는 제사의 정결함을 해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마야는 자해와 카카오를 통해, 잉카는 치차의 상징적 사용을 통해 술 없이도 충분히 의식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방식은 결과적으로 공동체 내 질서와 계층 구조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술이 허용되면 감정의 격렬함이나 무질서가 따라올 수 있는데, 종교적 공간에서는 그 어떤 혼란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상징적 음료, 규율 있는 절차, 엄격한 제작자 기준을 통해 신과 인간 사이의 ‘신성한 거리’를 유지했던 것이죠.
현대에도 이러한 유산은 남아 있습니다. 멕시코 일부 마야 후손 공동체에서는 여전히 카카오 음료를 제례에 사용하며, 페루 고산지대에서는 술 대신 향이나 허브 연기를 사용한 제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술 없는 제사의 전통은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문화입니다.
술 없이도 신은 가까이 있었다
마야와 잉카 문명은 술을 배제하면서도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정성스럽고, 철저한 제례 문화를 남겼습니다. 그들은 술 대신 자신의 피, 카카오, 치차, 향기, 몸짓, 노래를 통해 신과 대화했습니다. 그것은 외적인 취함이 아니라, 내적인 집중과 정결함을 통한 ‘신성함의 실현’이었습니다.
우리가 종교나 제사를 생각할 때 흔히 떠올리는 술잔 대신, 이들 문명은 보다 섬세하고 조화로운 방식으로 신을 만났습니다. 이처럼 술이 반드시 신을 부르는 도구는 아니며, 때로는 맑은 정신, 진심어린 의식, 그리고 상징의 힘이 신성함을 더 깊이 있게 전달한다는 사실을 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