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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문명의 술 – 신에게 바치는 첫 잔

by 어반IT 2025. 4. 10.

우리가 오늘날 마시는 술 한 잔, 그 기원은 단순한 즐거움을 위한 음료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인류에게 있어 술은 신성한 존재였으며, 때로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때로는 신 자체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고대 문명의 술’은 단지 취하는 물질이 아니라, 인간과 신, 삶과 죽음, 농경과 생명의 연결을 상징하는 도구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수천 년 전 문명 속에서 술이 어떻게 ‘신에게 바치는 첫 잔’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메르와 이집트 – 곡식의 신이 빚은 술, 신에게 돌아가다

술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문명이 바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입니다. 수메르인은 세계 최초로 맥주를 발효해 마신 문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이 남긴 점토판 속에는 맥주의 제조법과 함께 제사 의식에서 맥주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맥주는 여신 닌카시(Ninkasi)의 선물로 여겨졌으며, 매일 아침 사원에서 신에게 바치는 의식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신전에 바쳐진 맥주는 ‘음용’이 아니라 ‘연기와 향’을 통해 신에게 전달되었다고 믿어졌습니다. 술의 향과 발효 과정은 곡식의 생명력을 상징했고, 이는 농경문명과 신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인식되었습니다. 일부 점토문서에는 신이 인간의 술을 통해 기뻐한다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하죠.

이집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집트의 빵과 맥주는 태양신 라(Ra)의 축복 아래 있는 신성한 음식이었습니다. 파라오가 죽은 뒤 저승에서도 마실 수 있도록 무덤에 맥주와 술단지를 함께 매장하는 풍습은 매우 일반적이었습니다. 실제로 발굴된 왕릉에서 5천 년 전의 맥주항아리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집트에서는 술이 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사제를 위한 음식이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성스러운 술은 신전에서 근무하는 사제와 종교계급에게 일정량 분배되었으며, 이는 단순한 급여가 아닌 ‘신의 일부를 나누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즉, 술은 이들 문명에서 '경건하게 나누는 신의 잔'이었던 셈입니다.

고대 그리스 – 술이 곧 신이었던 사회

고대 그리스에서는 술이 단순히 신에게 바치는 제물 이상으로, 그 자체가 ‘신화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Dionysos)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신으로, 축제, 황홀경, 농업, 풍요, 그리고 광기까지 상징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신이 아니라 ‘와인 그 자체’였으며, 그의 존재는 곧 포도주의 탄생과 동일시되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의 이름 아래 열린 축제에서 대규모의 술 의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디오니시아(Dionysia)라 부르며, 도시 전체가 술과 연극, 음악으로 흥청거렸고, 포도주를 신에게 바치는 의례가 축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때 사용된 술은 단순한 음용 목적이 아니라, ‘신과 하나가 되는 도구’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술을 마시는 행위를 통해 신과 합일하는 감각, 이른바 엑스터시(ecstasy)를 경험하려 했습니다. 이 개념은 종교적 열광 상태로 이어지며, 이후 유럽 전역에서 종교의식과 축제문화로 확산되었습니다. 심지어 일부 철학자들은 술의 힘으로 인간이 신과 같은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와인은 단순히 취하는 음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음주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경건함을, 과음에 대한 비난보다는 해방감을 느끼는 문화가 강했습니다. 술은 그야말로 ‘신을 마시는 행위’였던 셈입니다.

그리스 아테네
고대 그리스

고대 중국 – 제사와 예법 속에서 지켜진 술의 의례

동아시아에서도 술은 중요한 종교적 상징이었습니다. 특히 고대 중국은 술과 제사의 관계를 매우 엄격하게 규정한 문명입니다. 주(酒)는 예(禮)의 일부였으며, 단순한 음료가 아닌 ‘신과 조상에게 드리는 정성’ 그 자체였습니다. 은나라와 주나라 시대에는 이미 제사 의식에서 술의 역할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종묘와 사직 제사에서는 술이 빠지지 않는 핵심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고대 중국에서 술을 제조하고 바치는 과정 모두가 ‘의례’였다는 것입니다. 술을 담는 잔, 술을 따르는 횟수, 심지어 술을 놓는 방향까지 모두 정해진 규범이 있었고, 이를 어기는 것은 신에 대한 무례로 간주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한국이나 일본의 제례 문화에 ‘홀수 번 술을 따른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잔을 놓는다’ 등의 전통이 남아 있는 이유도 이와 같은 유교적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죠.

한편 고대 중국에서는 술을 통해 신과 대화를 시도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사 전날, 사제들은 금식하고 몸을 정결히 한 뒤 술을 빚는 ‘의례용 발효’를 수행했으며, 이 술이 제대로 발효되지 않으면 이는 곧 신의 불만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술은 ‘시간의 예언자’처럼 여겨졌던 것이죠.

그만큼 술은 ‘경건함의 형태’였습니다. 지금의 음주와는 전혀 다른, 고요하고도 규율 있는 문화 속에서 술은 신에게 올리는 가장 인간적인 정성 중 하나였습니다.

잔 하나로 이어진 인간과 신의 이야기

고대 문명에서 술은 단지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고, 조상과 교감하며, 자신을 정화하고 되돌아보는 경건한 의식의 상징이었습니다. 잔 하나를 놓고도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매우 깊고 넓었습니다.

오늘날 술은 대부분 오락이나 여가의 의미로 소비되지만, 그 뿌리는 아주 오랜 전통의 경건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맥주 한 잔, 와인 한 잔을 들 때마다 ‘왜 이 음료가 특별하게 느껴지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과 신을 연결해 온 술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릅니다.